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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스키소설

스키소설 '고수(高手)'-프롤로그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한 장면


<프롤로그>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검술 고수로 일컬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활동하던 시대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붐비는 인파 사이를 걸어가다가 그만 어떤 낭인 무사의 발을 밟고 말았다. 성격이 불같은 낭인은 펄펄 뛰며 결투를 신청했다. 생전 칼이라고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는 고민 끝에 당대의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비굴하지 않게 죽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어떤 무술을 익혔소?"

"무술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허나 이상한 일이오. 무술을 모른다는 사람 몸에서 기가 느껴지다니!"

미야모토 무사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럼 다른 기예는 익힌게 없소?"

"한 40년 다도(茶道)를 했습니다만……"

"그럼 어디 나한테도 차를 한 잔 따라 주겠소?"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다도 명인의 솜씨를 찬찬히 살펴 본 뒤 말했다.

"당신의 다도 솜씨에는 감동했소."

"곧이어 닥칠 죽음의 공포도 잊고 한 동작 한동작에 사력을 다해 몰두하는 자세!"

"당신은 이미 죽음에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소."

"이제 적과 맞서게 되면 바로 차를 대접할 때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눈빛으로 칼을 치켜 드시오."

미야모토 무사시의 충고를 들은 다도 명인은 지정한 시간에 결투장소로 나가 낭인 무사를 만났다. 그는 칼을 치켜올린 채 마치 차를 따를 때처럼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단칼에 내려치리라는 일념으로 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낭인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자세에는 한 점의 허가 없었으며 석양빛에 번쩍이는 그 칼날에는 이미 자신의 피가 묻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 사람이야말로 검술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 낭인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이처럼 도(道)나 예(藝)나 그 궁극에 이르면 모두가 하나인 법이다. 

위에 옮긴 글은 얼마전 읽은 책에서 본 내용이다.

나는 어떤 분야든 그 궁극에 이르면 하나라는 말에 공감한다. 최선을 다해, 지극한 정성으로 어떤 일에 매진하는 사람은 범인과는 다른 깨달음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고수(高手)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스키라는 기예를 도의 경지로까지 끌어오려야 진정한 고수(高手)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키의 고수(高手)는 슬로프의 정상에 섰을 때의 자세에서부터 범인과 다른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키 철학을 가지고 빛나는 눈빛으로 슬로프의 정상에 서는 사람이 고수(高手)다. 

아무리 급경사의 슬로프 위에 서더라도 '여기를 어떤 기술로 내려갈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고수(高手)라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어떤 시를 쓸까? 어떤 음악을 연주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高手)다.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스킹을 할 때 그의 스킹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이 떠오른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눈 덮인 아름다운 설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한 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서 누군가가 스킹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몸짓과 스킹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스키에 대한 애정, 태도와 생각들을 온통 쏟아 부어 슬로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한다. 

누군가가 강렬한 원색의 유화를 그려 놓으면 누군가는 여백의 미를 살린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누군가의 스킹에서는 광적인 헤비메탈이 들리고, 누군가의 스킹에서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들린다. 힘이 느껴지는 락이 있는가 하면 리듬이 느껴지는 왈츠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스키를 사랑한다.
스포츠로서가 아니라 예술로서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의 스킹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것은 완성을 향한 나의 구도의 몸짓이다.



 권재희: 올려진 강렬한 `고수`다운 이미지가 프롤로그의 느낌을 한층 up시켜주네요~ 기대됩니다~~^^  [10/20-09:52] 
 남상오: 역시 언제나 처럼 글 솜씨에서도 스키의 기가 느켜집니다.  [10/20-10:45] 
 최영환: 글에서 이미 고수의 기세가 느껴집니다. 눈 위에서의 기세를 글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셨군요. 멀리서 응원을 보냅니다.  [10/20-10:48] 
 정윤성: 오옷(무림버젼) 상당히 기대됩니다.....^^  [10/21-23:20] 
 이봉우: 위 글 중 "눈 덮인 아름다운 설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한 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서 누군가가 스킹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이다" 대목을 읽다보니 문득 빌리 보그너가 제작한 " Fire & Ice"란 영화 장면이 떠오릅니다. 1편 2편이 있는데 1편은 일본서 레이저디스크 사 오신 선배님 댁에서 보았고 2편은 한 8년전 쯤 뮨헨 동계스포츠박람회때 트로이카 김 선일 사장 알선으로   [10/22-08:33] 
 이봉우: 뮨헨의 한 극장에서 시사회때 보았는데  듀엣 발레나 파우더 에잇을 그리는 스키어들 여러명이 펼치는 에어리얼 등등  한 마디로 스키 고수들이 펼치는 동작 하나 하나가 "예술"이란 말 밖엔 달리 할 말이 없더군. 우찬아! 글을 쓰다 보면 간혹 미꾸라지 한 마리가 껴들어서 흙탕물을 만들때도 있겠지만 개의치 말고 열정과 성실로 글을 올려주길 바란다.  [10/22-08:41] 
 장규원: 정데몬은 글쓰는 재주도 남다르군요. 훌륭한 강사생활 하세요.  [10/25-12:56] 
 sunny: 형부, 늦은 밤까지 웅크리고 앉아 뭘하나 했더니 홀로 산고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구료...홧팅!!  [10/2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