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키/스키소설

스키소설 '고수(高手)'-1




허벅지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듯하다.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감각기관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허벅지를 꼬집는 것만으로는 이제 쏟아지는 졸음을 막기 힘든 것 같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벌써 두 달이 넘었으니 허벅지에도 굳은살이 박였을 거야.'

차창을 약간 더 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거세게 몰려 들어온다. 이제 눈은 그쳤지만 달리는 차들로 인해 휘날리는 눈 조각들이 사납게 얼굴을 때린다.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고글이 아쉬웠다. 고글을 낀 상태로라면 이 정도 눈바람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였다. 유난히 눈이 많았던 올 겨울 명완은 스키를 타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눈바람을 수도 없이 경험했었다.

다시 창문을 올려 찬 바람이 이마를 스칠 정도만 남겨두었다. 졸음은 여전히 명완의 눈꺼플위에 앉아  무겁게 짓누른다. 눈에 잔뜩 힘을 주어 몇 번인가 떴다 감았다 해 본다. 평상시엔 없다가 아주 피로할 때만 나타나는 두터운 쌍꺼플이 생겨나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 

'아마 거울에 지금 내 눈을 비춰본다면 어릴적 만화에서 보던 구영탄같은 눈 일게다.' 

명완은 다시 한번 눈을 비비며 투덜거렸다. 기분 나쁜 쌍꺼플을 지워버리기라도 하듯 눈을 문질러댔다. 참을 수 없이 졸릴 때면 가끔 하곤 하던  행동들이 마치 티셔츠의 단추를 채우듯이 하나 둘 연속해서 되풀이 되고 있다. 꼬집기, 눈비비기,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소리 지르기이다. 차 안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다 보면 가끔은 그 큰소리에 자신 스스로 놀라 잠이 깰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저녁엔 마지막 단계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 가슴가득 차가운 공기를 들이켠 순간, <분당>이라고 쓰인 고속도로 출구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에서의 운전과 달리 이 곳부터 집까지는 복잡한 차들과 이리저리 구부러진 커브길 때문에 졸음이 자리할 틈이 없어진다. 고속도로에서 빠져 나와 판교사거리를 거쳐 계속 직진하면 율동공원이 나온다. 이제 다 왔다. 율동공원 약간 못 미쳐 우회전하여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젠 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긴 한숨을 내쉬고 깊숙이 의자에 몸을 기대본다. 이미 시간은 11시 30분을 넘어서고 있다. 눈을 감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이런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가 잠이 든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추운 겨울밤의 한기 때문에 깨어나 일어나보면 자정이 넘어 새벽 1시가 가깝곤 했다. 그런 날들이 몇 번인가 지난 후부턴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천근처럼 무거운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깜깜한 어둠만이 명완을 반겨준다. 
아내와 아이가 떠난 빈 집에 들어설 때마다 처음 만나는 이 어둠은 차가운 얼음 장벽처럼 명완을 떠밀어내는 것 같다. 그것은 스키장의 차가운 아이스반보다 더욱 서늘하게 명완의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런 경험이 며칠동안 되풀이 되었지만 명완은 오늘도 온 몸으로 소름이 돋는걸 느낀다.

불을 켜지 않은 채 어둠을 더듬어 화장실로 들어섰다. 이미 어둠을 더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아내와 아이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리 없이 불빛도 없이 밤고양이처럼 드나들기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지금은 비록 아내와 아이가 없지만 그래도 익숙해진 버릇 때문인지 불을 켜기가 싫었다.

"쏴악~"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샤워기로부터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면 명완은 서있기도 힘든 사람처럼 벽에 두 손을 기대고 서서 한동안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뜨거운 느낌을 즐긴다. 이 느낌이 와야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느낌이다. 욕탕에 중간정도 물이 차오르자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지혜와 소연이는 잘 있을까?'

아내와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무거운 쇳덩이가 가슴 위를 짓누르는 느낌이다. 지혜는 지난 일요일에 소연이를 데리고 처가로 떠났다.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이미 오일전의 일이다.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그녀는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명완은 조금도 화를 낼 수 없었다. 

'서른 중반에 앓는 상사병이라……. 아마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없겠지. 나 스스로도 지금의 나를 이해하기 힘드니까.'

지난 해 여름 잘나가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조그만 중소기업으로 옮겼을 때에도 지혜는 펄펄 뛰었었다. IMF이후 경제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요즘 같은 시절에 그나마 잘나가는 몇 안되는 대기업을 그만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래서 아내가 그나마 납득할만한 구실로 갖다 붙인 것이 창업이었다. 

'창업을 위해서는 규모가 좀 더 작고 나의 전문분야를 살릴 수 있는 회사가 좋다, 그런 회사에서 경영의 전체적 면모를 살펴보고 경력을 쌓으며 창업 준비를 하겠다, 직함 상으로 부장이라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영 전반을 사장과 같이 논의하게 될 것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대기업에 버티고 있어봐야 40대 중반이 되면 대부분 조기 퇴직해야 하는 것이 실정이다…….'

나름대로 그럴듯한 구실을 갖다 붙였다. 물론 전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마음은 딴 데에 있었다.   

당시의 그가 아내에게 도저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유. 그것은 스키였다. 지금 생각해도 우습지만 어쨌든 그것은 스키 때문이었다. 서른 중반에 맞이한 상사병의 대상은 젊고 예쁜 아가씨가 아닌 날카롭게 날이 선 무뚝뚝한 스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