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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스키소설

스키소설 '고수(高手)'-2



강명완. 
그가 스키에 이처럼 매혹된 것은 지난 2002년 3월, 그러니까 01/02스키시즌이 끝날 무렵이었다. 그동안 명완은 주말스키어로서 일년이면 서너 차례 친구들이나 회사동료들과 어울려 스키장에 놀러가던 평범한 주말 스키어였다. 

대학시절 스키를 배운 이후 대부분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스킹을 하였기에 분위기는 항상 스킹보다는 먹고 마시며 노는 일이 더 중요한 관심거리였었다. 하지만 명완은 중학교 때까지 축구부에서 활동을 했었고, 고등학교에서는 비록 축구부활동은 그만두었지만 학년대표로 뛸 정도로 꽤 뛰어난 운동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별다른 강습 없이 즐기며 탔음에도 무리 없이 패러렐턴까지 익힐 수 있었고, 급사면만 아니라면 숏턴도 어느 정도 흉내낼만한 수준이 되었다. 함께 스키를 탔던 친구들이 채 패러렐턴을 완성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스킹향상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명완은 나름대로 스킹이라면 우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그러다 우연히 2000년 12월 직장후배로부터 "스노우 프랜즈(snow friends)"라는 스키동호회를 소개받았다.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호회라서 회원도 많지 않은데다 회원들도 적당히 연륜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마침 스키가 늘지 않아 스키에 대한 흥미를 잃어갈 때여서 흔쾌히 동호회에 가입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스노우 프랜즈에는 몇몇 젊은 친구들을 제외하면 자신보다 잘타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런 점이 자존심 강한 명완에게는 또 다른 만족감을 주었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초보자 강습을 한달에 한번씩 맡게 되었다. 새로운 신입회원들이나 여성회원들을 가르치면서 나름대로 우쭐하는 기분도 있었고,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스킹을 하면서 쉽지 않던 급사면에서의 숏턴도 조금씩 감이 오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스노우 프랜즈를 만나기 전에는 일년에 십여번 안팎 스키장을 찾는 수준이었지만 2001년 1월부터 시즌이 끝나는 3월 중순까지 거의 한주도 빠짐없이 스키장을 찾았다. 토요일 야간과 일요일 하루 온종일 스킹을 하면서도 함께 스킹하는 재미에 푹빠져 힘든 줄 모르고 스킹을 즐기곤 하였다.

이렇듯 새로운 재미에 푹빠져 즐기다보니 스키시즌이 끝난 봄부터 가을까지도 스노우프랜즈 모임이라면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스키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동호회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름에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엠티를 기획하기도 하였고, 가을에는 산행번개도 몇 차례 이끌면서 어느덧 동호회의 주도적 멤버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보니 그에게 일 년 만에 총무라는 책임 있는 직책까지 주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동호회활동을 하면서도 스키는 어디까지나 레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의 계기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2001년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후 스노우프랜즈는 시즌 첫 정기모임을 대명 비발디파크에서 가졌다. 오랜만에 많은 동호회원들이 모여 신나게 스킹을 즐기고 저녁에는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으면서 피곤한 사람들은 먼저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였다. 

명완은 기분 좋게 취한 상태라서 슬슬 자리를 정리할 생각에 담배도 피울 겸해서 콘도 베란다로 나왔다. 슬로프에서는 환하게 불을 밝히고 제설작업에 한창이었다. 차가운 겨울밤에 흩날리는 눈꽃들은 비록 인공설일지라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법이다. 특히 다음날의 신나는 스킹을 생각하는 스키어의 눈엔 어떤 미인의 모습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입가에 미소를 걸고 슬로프를 바라보고 있는데 베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동호회 동생인 우현이 그 껑충한 키에 안 맞는 익살스런 몸짓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현아, 왜 그리 몸을 비비 꼬냐?"

"아, 글쎄 형민이 자식이 너무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속이 뒤틀려서 말이에요."

우현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기에 명완은 자신이 피우던 꽁초를 건네며 빙그레 웃었다. 형민이는 우현이와 서른세 살의 동갑내기 단짝친구로 동호회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어찌나 재미난 얘기를 잘하는지 녀석이 끼는 자리엔 항상 웃음이 사라질 줄 모른다. 그런 형민이 또 어떤 얘기를 꺼내 사람들을 재미나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이번엔 지저분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는 모양이다.

우현이 담배에 불을 붙여서는 깊게 빨아들이자 빨간 담배불빛이 더욱 빛난다. 우현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명완은 자신의 머릿속을 뒤져보지만 누구도 우현이 처럼 특이하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아주 길게 천천히 담배를 빨아들여서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후~욱 하며 길게 내뿜는 데 마치 주술사가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정성스럽게 담배를 피운다. 특히 담배연기를 내뿜을 때는 마치 세상의 시름을 쏟아내는듯 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우현이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를 내뱉는다.

"저, 명완이형. 이번 시즌에 저 준강사 시험에 도전할 계획이에요."

"어? 그래? 하긴 요즘 스키 좀 타는 사람들은 많이 도전하는 것 같더라. 너 정도 실력이면 한번 해 볼만 할 거다."

명완은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명완이형. 형은 어떠세요? 같이 해 볼 생각 없으세요?"

"어? 내가? 글쎄……."

"이번에 기수도 함께 보기로 했거든요."

"기수도? 그런데 이번 모임에 안 왔던데?"

"네, 그 친구 이번 시즌에 지산스키장에서 패트롤로 일한대요. 요즘 시즌 초라 바빠서 시간내기가 힘든가 보더라구요."

"어, 그랬구나."

기수를 생각하자 명완의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이십대 후반으로 지난 시즌에 명완보다 한 달 정도 뒤늦게 동호회에 가입한 동생이었다. 스키를 처음 시작한 그를 초보자 몇 명과 함께 명완이 넘어지기와 일어서기부터 가르쳐준 친구였다. 

어떤 운동이던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 명완은 초보자에게 스키를 가르칠 때 온종일 초급코스에서 기초를 가르치는 교육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기수는 점심식사 후 사라져서는 폐장시간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온종일 구르며 중급과 상급에서 탔다는 소리에 화가 난 명완이 잔소릴 잠깐 했었는데 처음엔 머리위로 김이 오르더니 잠시 후엔 눈에 띄도록 덜덜 떠는 것이었다. 명완이 의아해하며 물어보자 팬티까지 다 젖었다며 부끄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명완은 고개를 저으며 잔소릴 그만둔 적이 있었다.

그 후 기수는 명완의 눈 밖에 나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렇게 시큰둥한 관계로 시즌을 보내고 우연히 시즌 말에 기수의 스킹을 보는 순간 명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1월에 스키를 시작했으니 기껏해야 두 달 정도 스키를 탔을 텐데 어느덧 패러렐턴을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교육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킹을 배웠던 기수가 그처럼 실력이 늘었다는 것에 명완은 사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었다. 동호회 내에서 가장 스킹을 잘하는 우현과 친하게 어울려 지냈으니 아마도 우현에게서 스킹을 배운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적이 있었다.

그것이 지난 시즌 폐장일이 가까와서이니 명완이 생각하기에는 기수가 너무 건방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런데 우현아, 기수 그 친구 지난 시즌에 스키 처음 시작했는데 올 해 강사시험을 보는 게 가능하냐?"

"네, 사실 저도 작년에 기수랑 몇 번 안탔었는데 볼 때마다 많이 늘더라구요. 아직 부족하긴 한데 패트롤로 일하면서 많이 배울 테니까 한번 기대해 볼만 하겠죠? 그래도 아마 이번 시즌엔 힘들지 않을까 저도 생각해요."

우현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자 명완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수긍을 표시했다. 이로써 기수에 대한 관심은 명완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우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형이 가능할까?"

"형은 워낙에 자세가 잘 나오잖아요. 제 생각엔 숏턴만 좀더 가다듬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래? 한번 고민해보자."

우현이 먼저 춥다며 들어가고 명완은 혼자 베란다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준강사 시험이라……. 나같은 아마추어가 가능할까? 힘들겠지?'

'그래도 한번 해 볼까? 요즘 스키사이트에 보면 좀 탄다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도전하는 분위기던데……. 하긴 내 실력도 많이 늘었고, 동호회에서 누구 가르치려면 강사자격증 정도는 있어야 겠지? 지난 시즌에 스키시작한 기수도 본다는데 내가 못할 것은 없지.'

'그래, 한번 해 보자. 붙던 떨어지던 실력은 많이 늘겠지.'

명완은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내며 깊은 숨을 들이 마셔본다. 겨울의 찬 바람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우며 들어온다. 새로운 도전의 대상을 맞이한 명완의 가슴이 힘차게 뛴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제안이 그의 삶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킬지 당시의 명완으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