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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스키소설

스키소설 '고수(高手)'-6

살다보면 우리는 그날 그날 닥치는 일이나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에 대해서만 겨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외적인 가치를 성공이라 믿고 쫓다보니 내적인 균형이 허물어 집니다. 

깊은 인생은 없고 누구나 비슷한 복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 죽게 될 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 바로 이 내면적 가치를 찾아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3월 3일 토요일.

새벽에 잠이 깬 명완은 시험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제대로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피곤하면 안 될 것 같아 겨우겨우 잠을 청해보지만 얕은 잠이 들었다 다시 깨곤 한다. 우현의 코고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린다. 어둠을 더듬어 시계를 찾아보니 새벽 5시 25분.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명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현의 잠을 방해할까봐 조심스럽게 움직여 화장실로 가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미 우현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현아,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난 거니?"

"아니에요. 밥 먹고 바로 나가면 속이 안 좋을 것 같아서 좀 일찍 알람을 맞춰났어요. 밥 먹고 어느 정도 소화시킨 다음에 나갈려구요."

작은 배려지만 우현의 세심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은행원으로 십 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몸에 익숙해진 꼼꼼함이 일상의 작은 부분에도 적용되는 것 같았다. 

지난밤에 준비했던 콩나물국을 데워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치우고 천천히 스키 장비들을 챙겼다. 시간의 여유가 마음의 여유까지 가져오는지 지난밤과는 달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하나하나 필요한 장비를 챙겨 슬로프로 나갔다. 

1번~300번은 푸르그보겐 시험을 보기 위해 10번 슬로프로 올라갔다. 우현이 먼저 떠나고 나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험분위기가 온 몸을 조여 온다. 기수를 만나 함께 리프트를 타고 8번 슬로프로 올라갔다.

낮에 탈 때와는 다르게 7시도 안 된 이른 시간이라 설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루밍차가 지나간 자리 그대로 가지런하게 정리된 슬로프를 따라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패러렐 턴으로 몸을 푼 뒤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자 벌써 전주자가 출발할 시간이 다 됐다. 

301번부터 출발하니 명완은 스물여섯 번째. 채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타야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명완은 그동안 패러렐 턴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 새겼던 사항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일단 출발에서 스케이팅을 하면서 자신감 있게 출발하자. 첫 출발부터 3~4턴까지가 가장 중요하다.'

'스케이팅 후 어느 정도 속도가 붙으면 다리를 어깨 폭보다 넓게 벌려 양 무릎이 동시에 넘어가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크로스오버 동작을 크게 해서 다리를 옆으로 많이 뻗고 뉘여 주어 날을 많이 세운다. 최대한 카빙을 이용해 턴을 만들어야 좋은 점수가 나온다.'

어느덧 명완의 순서가 되었다. 앞에 출발한 사람들을 보니 턴을 꽤 크게 그리는데도 7턴이나 그 이상 나오는 것 같다. 명완은 스케이팅 구간을 좀 더 길게 가져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심장의 쿵꽝거리는 박동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리는 기분이다. 

"명완형님, 화이팅!"

뒤에선 기수의 짧고 힘이 들어간 화이팅소리를 들으니 명완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는 기분이다.

"326번 출발"

출발심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차게 스케이팅을 하며 치고 나간다. 예상했던 지역까지 스케이팅을 하려했지만 속도가 이미 많이 나서 나중의 몇 번은 단지 흉내만 냈다. 드디어 예상지점. 힘 있게 다리를 뻗어 엣지를 세우며 턴을 만들어 갔다. 워낙에 그루밍이 잘 된 상태여서 깨끗하게 자르고 지나가는 느낌이 온다. 감이 좋다. 

하지만 생각보다 속도가 붙는 바람에 두려운 마음이 인다. 세 번째 턴을 빠져나오면서 몸이 약간 뒤로 빠지는 느낌이 든다. 우현이 말한 대로 주먹을 힘껏 쥐고 상체를 낮게 앞으로 밀어낸다. 뒤로 빠지던 중심이 제자리를 찾으며 안정적으로 다시 턴을 만들어 간다. 어느덧 6번의 턴을 마치고 피니쉬라인 앞에 섰다. 심판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왔다. 

앗싸!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턴을 마친 것 같아서 명완은 기분이 좋아졌다. 좀 전의 턴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며 천천히 내려가다가 문득 뒤에서 내려올 기수가 떠올라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기수는 하늘색 계통의 옷을 입어서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드디어 기수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힘차게 스케이팅을 하며 치고 내려오다가 주저함 없이 턴을 그리며 빠르게 카빙롱턴으로 전환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다이나믹하다. 정확히 여섯 턴을 그린 뒤 멈춰서 심판들에게 인사한 뒤 아래로 내려온다. 

명완에게 익숙해진 우현의 패러렐턴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멋지게 회전을 끝낸 기수를 보면서 명완은 한동안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다. 자신이 십 년 이상 스키를 타면서 겨우 도달한 어떤 경지를 기수는 두 시즌 만에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부러움, 질투, 자신에 대한 분노? 명완은 도대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수가 내려와서 형님 스킹이 정말 멋졌다는 둥 슬로프 설질이 좋다는 둥 건네는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명완은 자신의 감정을 분석하기 위해 열심이었지만 좀처럼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쥔 것처럼 머리만 아파오는 것 같았다. 명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이 고민을 접어두었다. 

패러렐 후에 곧바로 실시되는 푸르그보겐 연습을 위해 건너편인 10번 슬로프로 올라갔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다 보니 우현도 이미 보겐시험을 끝내고 슬로프하단에 대기하는 것이 보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그나마 설질이 괜찮아 보였다. 시험이 치러지는 슬로프의 가장자리에서 보겐을 연습하며 보겐에 필요한 포인트를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처음의 스키딩턴은 없다운없이 단지 바깥쪽 스키에 체중만 실어서 턴을 만든다. 이 때 체중을 실어주기 위해 어깨를 계곡 쪽으로 충분히 기울여주어야 하며, 상체는 외향을 유지한다.'

'다음의 스키딩+카빙턴은 바깥다리의 피봇팅을 활용하여 턴을 만든다. 이 때 자연스럽게 무릎이 안쪽으로 꺾이면서 다운 동작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후 체중을 옮길 때 업동작을 충분히 해주면 업다운 동작이 잘 보인다.'

'마지막의 카빙턴은 다리를 벌려주어 스키의 간격을 넓게 유지한 상태에서 바깥스키의 카빙으로 턴을 만든다. 이 때 안쪽스키는 바깥날도 안쪽날도 아닌 바닥면으로 설면을 디뎌준다. 상체는 어깨기울임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스키를 따라가며 전체적으로 낮은 자세를 유지한다.  '

명완은 핵심 포인트를 머릿속에 새기며 몇 차례 연습을 한 뒤 기수와 함께 베이스로 내려왔다. 푸르그보겐 시험이 패러렐 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순서가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시가 아직 안된 시간인데다 시험에 대한 긴장 때문인지 허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기수가 이것저것 군것질 거리를 사왔지만 명완은 단지 커피 한 잔만을 천천히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1~300번대 응시생들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아 명완은 기수와 함께 10번 슬로프로 올라갔다. 오전과 달리 눈이 점점 습설로 변해가고 있었다. 앞 번호의 몇 사람이 출발하고 얼마 안돼 명완이 출발하였다. 삼백여명이 지나간 자리지만 설질이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얼어있던 아침보다는 적당히 녹아있는 설질 때문에 스킹을 하기가 편하다.  

어깨의 기울임에 신경 쓰며 스키딩 세 턴을 마치고 스키딩+카빙턴에 들어갔다. 바깥쪽 다리를 충분히 비틀면서 피봇팅을 하고 무릎을 구부려 다운, 다시 일어서며 업동작을 크게 보여준다. 설질 때문인지 속도가 많이 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턴 크기가 나와 주는 것 같아 명완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마지막 카빙턴에서 좀 더 스키의 날을 세우고 자세를 낮추면서 스키가 어느 정도 속도가 붙도록 하였다. 바깥스키의 엣지가 정확히 맞물려 들어가며 눈을 자르고 지나가고, 안쪽스키의 바닥면이 눈을 훑듯이 지나가는 느낌이 온다. 턴 세 번을 끝내고 심판들에게 인사 후 한숨을 크게 내쉰다. 

명완은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체크포인트를 어느 정도 정확히 지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오전의 패러렐턴에 이어 푸르그보겐도 그럭저럭 잘 해낸 것 같아 어느 정도 기분이 업된다.

뒤이어 내려오는 기수를 보니 안정되게 잘 타고 내려온다. 푸르그보겐에서 보이는 기술의 차이는 안정감과 정확한 자세에 있다고 생각하는 명완은 기수가 그런대로 정확한 자세와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기수야, 잘했다."

"네, 형님도 뒤에서 보니까 정말 잘 하시던데요. 어깨 기울임이나 업다운, 카빙턴 모두 잘 하셨어요."

"후훗, 그래? 고맙다. 자, 이제 숏턴만 남았구나. 최선을 다해보자."

"네, 형님도 화이팅!"

오전의 패러렐턴을 마쳤을 때와 같은 어색한 침묵이 아닌 자연스럽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숏턴이 열리는 8번 슬로프로 이동하였다. 

1~300번대 응시자들이 저마다 멋진 자세와 빠른 스피드로 슬로프를 가르며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올라가서 확인해보니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패러렐턴 시험을 마친 상태였다. 301~611번대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푸르그보겐 시험을 보는 동안 1~300번대 응시자들이 먼저 숏턴 시험을 본다고 하기에 명완과 기수는 또다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인내해야 했다. 

거의 오후 3시가 가까운 시간 드디어 명완의 순서가 왔다. 패러렐턴의 출발지점보다는 꽤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출발하게 되니 구간은 생각보다 짧아서 다행이었지만 반면 설질은 그야말로 완연한 습설로 바뀌어 있어서 좋지 못했다.

300여명이 이미 지나간 자리이다 보니 곳곳에 크고 작은 눈 덩이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자리엔 제법 길이 잘 나 있지만 비슷한 크기의 턴 호를 그리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코스보다 큰 눈 덩이들과 만날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별로 지나지 않은 코스를 택하자니 습설의 눈에 스키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것은 더욱 큰 낭패였다. 진퇴양난이었지만 결국 명완은 남들이 지나간 코스를 택했다. 

"326번 출발"

출발심의 목소리를 듣고 출발한다. 숏턴에서 속도가 붙으면 위험할 것 같아 첫 턴을 계획했던 지점보다 일찍 들어갔다. 세 턴까지는 무난하게 잘 진행되더니 네 번째 턴을 들어가는 지점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요철을 만났다. 

"억"

헛바람 소리를 내며 잠시 중심이 흔들리더니 뒤로 빠졌다. 겨우 겨우 중심을 잡아보려하지만  이미 속도가 많이 붙은 데다 한번 어긋난 턴 호는 계속해서 눈 덩이들과 만나는 궤적을 그리기 시작해 거의 흘리듯이 턴을 그리며 마지막까지 내려왔다.

명완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이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고글과 모자를  벗어들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명완이 짜증나거나 답답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옆으로 빠져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심판들에게 인사도 하지 못했다. 다시 갈까하다가 이미 다른 선수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명완은 뒤돌아 나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 곁을 어느 정도 벗어나자 명완은 스키를 벗어버리고 슬로프 가장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완전히 망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시즌 나름대로 그 어느 해보다 열심히 탔던걸 생각하니 억울한 느낌까지 들었다. 고개를 푹수그리고 앉아 있는 명완의 어깨를 누군가 살며시 잡아온다.

"형, 힘내세요. 잘하셨는데 왜 그러세요?"

우현의 목소리이다. 이미 모든 종목을 끝낸 우현이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개도 못 돌리고 명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생각처럼 안 되네, 정말.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명완형,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후반에 턴이 좀 흐르기는 했지만 중반까지는 좋은 자세로 내려왔는데요 뭘."

"심판들이 중반 이후는 잘 안보는 편이니까 점수는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눈이 뭉쳐 있어서 대부분 응시생들이 턴이 터져서 내려오고 있어요."

우현이 명완을 위로하기 위해 주절주절 이야기 하는 것을 흘려들으며 명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오늘 과목들은 끝났으니 들어가자. 피곤하다."

"네. 그래요. 어? 그런데 기수는 어딨죠? 기수 내려오는 걸 못봤네."

아차! 하는 생각을 하며 명완도 고개를 돌려 기수를 찾았다. 우현과 이야기 하는 사이 이미 기수는 내려왔는지 시험장에선 기수 뒷 번호의 응시생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마지막 시험인데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좀처럼 기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명완은 미안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품고 슬로프를 빠져 나와 숙소로 향했다.



 박용호: 재미있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공짜 보랴니 보랴니 이거 죄송해서...^^  구독료는 먼 훗날 만나뵐때  한번에 해결하겠습니다. 헤헤   
 정우찬: 박용호님. 감사합니다.^^* 수금하러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들어가야 겠네요.^^ 그런데 비행기삯이 더 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심현도: 제가 잴먼저 읽은줄알았는데 벌써 답급에 또 답글까지...  
 하영진: 한국은 11월 1일-11월의 첫날입니다...스키동호회의 게시판마다 스키개장일에 대한 관심이 대단합니다...가을의 막바지라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
구요...어제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용평에도 잠깐 들렀구요...요즘은 우찬님의 글을 기다리며 또 읽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습니다...우찬님! 행복하시죠!!! 
 최진규: 업무시간에(?)  흥미를 갖고 잘 보았습니다 ..다음편이 기대 되네요  
 차재문: 그때의 기분이 현장감있게 잘읽고있습니다,,,,^^   

 이우현: 어라 내이름이 ㅋㅋ 기분 좋습니다.ㅋ

 이광규: 반쯤이죠^^ 재미나게 읽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