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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스키칼럼

잊을 수 없는 한 사람

1. 첫 만남


발아래로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발디딤만이 내 몸을 버팅기고 있다. 가을의 한복판에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의 모습도, 오랜만의 맑은 날씨로 서울시내가 다 보일 것 같은 시원스런 조망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리의 힘이 조금씩 빠진다. 느낌만으로는 자꾸만 발이 바위에서 밀려 내려가는 것 같다. 힘들게 손을 뻗어 바위를 더듬어 보지만 손 끝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현재 두 발을 모아 딛고 있는 스탠스에서 오른발을 올려 무릎 정도 높이에 있는 작은 돌기를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의 작은 돌기인데다 아래로 약간 기울어 있어 도저히 발디딤이 될 것 같지가 않다. 


곤충의 더듬이처럼 조심스럽게 오른발을 올려 이리저리 디뎌보지만 좀처럼 자신이 서질 않아 다시 왼발이 딛고 있는 그나마 안정된 발디딤으로 오른발을 내려 놓는다. 형이 분명히 이 곳을 딛고 오르는 걸 봤는데도 나는 정말 자신이 없다. 형은 무슨 본드를 발바닥에 붙이고 오르는지 평지를 오르듯 자연스럽게 올라갔는데 말이다. 


"야! 믿어. 일단 믿고 일어서봐. 형도 거기 딛고 일어섰어. 너도 할 수 있어!"


4~5미터 위에서 빌레이를 보고 있는 두현형이 입가에 하나가득 웃음을 담고서 내게 던지는 말이다. 남은 무서워 죽겠는데 뭐가 즐거운지 바위를 오르는 내내 웃음이 떠날줄 모른다. 아마 오랜만에 초보 산꾼들을 이끌고 오르는 것이 신나는 모양이다. 우리들의 무서움에 떠는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형의 지난 초보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 떨어져봐야 죽기야 하겠어? 일단 올라보자.` 

그 웃음때문에 오기가 생겨나 다시 오른발을 올려 돌기위에 디딘후 살짝 문질러 밀어넣었다. 마치 신발바닥의 고무창안으로 돌기를 끌어들이려는 듯이.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건 무섭다.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 누구나 생각으로는 떨어져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막상 놀이기구를 타거나 올라가보면 생각과 상관없이 공포심이 온 몸을 사로잡는 것처럼. 


"자 우찬아. 조금만 더 힘내자."

"끙~" 


형의 말이 채 끝나기전에 온 몸의 힘을 오른발 발가락끝에 주며 몸을 실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작은 돌기가 내 몸을 받치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오른발을 펴며 손을 뻗어 오른 손위의 홀드를 잡으면 된다. 그러나 오른발을 펴는 그 순간이 왜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손에 닿을 것 같으면서도 홀드는 아직 잡히지 않는다. 신발안에서 발가락끝이 조금씩 흘러내린다.

`안돼! 으~조금만 더`

발가락의 움직임은 멎었다. 안간힘을 쓰며 다시 오른발을 뻗어 일으켜 세워본다.


"마지막 크럭스야. 조금만 더...그래..그렇게 하는거야." 


손끝에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다. 손가락의 첫 마디를 지나 둘째 마디를 지나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힘차게 움켜 잡았다. 생각보다 꽤 안정된 홀드이다.


"휴~우"

"잘했다"


위에 있는 두현형의 웃음이 더욱 환하게 느껴졌다. 손에 힘을 주어 몸을 끌어 당겨 올렸다. 생각보다 쉽게 몸이 올라온다. 큼직하게 갈라진 크랙을 따라 몇번의 큰 동작으로 홀드를 잡고 오르니 두현형이 코앞에 앉아 있다. 드디어 확보장소다. 이제 다음 등반자가 올라 올 때까지 쉴 수 있다. 확보줄을 풀어 볼트에 걸고 한숨을 크게 쉬어본다.


"휴~우" 


형이 그런 나에게 좀 전의 환한 미소를 보내며 뒷 쪽을 가르킨다.


"어떠냐? 아름답지?"


형이 가르키는 곳은 절벽의 건너편 활활 타오르고 있는 아름다운 북한산의 산자락이다. 가을이라 바람이 약간 차게 느껴진다. 저 멀리로는 백운대가 보인다. 바위를 가로지른 쇠줄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오르는 곳. 백번도 넘게 올랐을 그 곳에 서서 나는 이 곳 인수봉을 오르길 얼마나 갈망하였던가.


백운대에서 보이는 인수봉은 그 저 미끈미끈한 바위일 뿐이다. 그 곳에 도저히 사람이 딛고 오를 만한 것은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그 곳을 오른다. 어릴적 내 눈에는 `죽을려고 환장한 미친 사람들`로만 비춰졌었다. 하지만 어느때부터인가 백운대를 오르는 것이 아주 쉽다고 느껴지면서 부터는 그 곳을 오르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바위가 `인수봉`이라 불리는 것도, 한국 산악인들의 정신적 요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 곳을 오르는 사람이 되어 이렇게 바위에 붙어 있다. 아직 정상에 올라선 것은 아니지만 가슴이 벅차 오른다. 그것은 좀전까지 느꼈던 추락의 공포에서 느껴지는 가슴뜀이 아니었다. 내가 먼지처럼 작은 나의 존재가 이 산만큼이나 커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은 바로 `살아 있다`라는 환희이다. 어떤 철학적인 깨달음이 아닌 그저 가슴으로 느껴지는 `살아있음`의 느낌.


"단지 첫 경험이다. 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 그 혀끝만 대본거야...."


형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빌레이에 집중하려는지 밑에 올라오는 후등자로 시선을 돌렸다.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후등자가 올라오는대로 줄을 당겨주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럽고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다. 지난주 등산학교 모임 끝날 때 잠깐 인사나눴을 뿐 정식적으로 인사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아침에 야영장에서 모여 인사 나눌때 형이 우리조의 리더라는 것을 알았다.


"백두현입니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형을 보면서 목소리가 무척 밝다고 느껴졌다. 형은 키가 크고 마른편이었다. 산악인하면 왠지 터프함의 대명사처럼 생각했었는데 형은 오히려 샌님처럼 차분한 말투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미소때문에 참 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마 나는 처음엔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저 사람 별로 같은데... 힘도 없어 보이고...`


하지만 바위를 오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와! 완전 스파이더맨이네.`

너무도 자연스럽게 바위를 딛고 오르는 그 모습은 마치 발레리나의 몸짓처럼 보였다. 어떤 동작도 힘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춤추듯 부드럽게 바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부드러움의 아름다움. 오히려 어떤 사람보다도 산에 어울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두현형은 거대한 산과 함께 다가온 다정다감한 산악회 선배였다.

그리고 그것이 형과의 기억되는 첫 만남이었다.






2. 두번째 만남


"형이 먼저 가세요. 제가 따라 갈께요."

"그래 형이 지나간 자리를 그대로 따라 와라."

"그럼요."

"앗~싸"


용평의 골드슬로프 정상에서 형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패러렐 턴을 하며 내려간다. 나도 뒤질세라 얼른 따라 붙었다. 가능하면 형이 그린 스풀자국을 그대로 따라 가려고 노력하면서 형의 속도에 맞춰서 스킹을 한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았지만 형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턴을 유도하며 빠르게 내려간다. 

`윽! 빙판이다.`

골드 상단부의 중간쯤에는 사람들이 쓸고 내려간 뒤의 빙판이 형성되어 있었다. 계곡발이 살짝 미끄러지면서 속도를 늦췄다. 형은 빙판에서도 흔들림없이 유연하게 빠져 나간다. 

`와~`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얼른 다시 속도를 내 따라 붙었지만 좀처럼 벌어진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골드 중단부의 계곡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슬로프가 좁아지고 그만큼 사람들도 많아지자 형이 속도를 줄여 숏턴을 하기 시작한다. 형과의 거리는 가까워졌다. 형의 숏턴을 흉내내 보지만 언감생심 마음만 앞설뿐 몸은 따라 주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리듬이 맞아 형의 스풀을 따라 짧은 회전을 해낼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정말 기분이 좋다. 사람들을 피해 가장자리를 따라 좁은 계곡을 빠져 나가자 슬로프는 다시 넓어져 하단부에 다다른다. 


형은 다시 큰 회전호를 그리며 우아하게 패러렐 턴으로 돌입하며 속도를 붙이기 시작한다. 나도 따라해보지만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속도가 나질 않는다. 더구나 따뜻한 날씨에 눈이 습설이어서 스키를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으니 눈으로만 멀뚱멀뚱 멀어져가는 형의 뒷모습을 쫒을 뿐이다. 잠시후 형이 기다리고 있는 리프트 대기열에 도착하자 형이 예의 그 큰 미소로 반기며 말한다.


"와~우찬이 많이 늘었는데"

"어 그래요? 앗~싸!"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안 바라본 용평의 산자락은 아름답게 빛난다. 흰눈에 덮힌 산들은 다른 어느 계절에 비해서도 더욱 산(山) 답다. 쉽게 다가가기 힘들게 하고 사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겨울산. 그래서 더욱 그 품에 파고들고 싶은 욕망을 이끌어내는 흰 눈 덮힌 산들. 그리고 이제 그 곳에 스키가 곁들여져 겨울산은 나에게 더더욱 산(山)답다.



"형은 이번에 1급 뱃지테스트 볼 계획이야."

나의 스키에 대한 상념을 깨우며 형이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어~그게 뭔데요?"


형은 차분히 뱃지테스트에 대해 설명하고 나중에 준강사시험까지 도전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처음 듣는 시험에 대한 얘기들도 놀랍지만 그런 시험들에 응시하려는 형의 계획이 더욱 놀라웠다. 


"형, 그런 시험들은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

"어려우니까 해보는 거지. 그런 목표가 있으면 스키도 더욱 열심히 타게 되고 그러다보면 스키가 더욱 늘 테지."

"너도 해보지 않을래?"

"제가요? 제가 무슨... 이제 스키 시작했는데요 뭘..."


순간 지난 해 참가했던 산악회 스키캠프에서 어느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스키강사는 다 선수출신이야. 일반인들은 평생 타도 힘들어."


그런 어려운 시험을 보겠다는 형이 참 대단해보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머리쯤에는 이런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럼 나도 한번 해볼까?`


"야! 안전바 올리자."


이런저런 스키얘기들을 나누며 올라오다 보니 벌써 골드 정상이다. 리프트에서 내려 아까와 같은 장소에 섰다. 그리고 또다시 형이 앞서가고 나는 뒤따라 가고...그렇게 형과의 신나는 스킹에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즐겁게 탄다. 하루의 스킹이 끝나갈 때쯤엔 처음보다는 훨씬 형의 스풀을 따라가기가 수월하다. 조금씩 형의 체중이동 시기와 리듬을 내 몸이 따라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형과의 스킹은 대단히 즐겁다. 스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듣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깊은 애정에 절로 고개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가르치려하기보다는 느끼게 하려는 형의 따뜻한 배려가 나를 감동시킨다. 

형에게서 패러렐턴의 기본을 배웠지만 그것은 강습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따라다니기` 인데 그 것 자체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행복했던 느낌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야 그거 그렇게 하면 안돼,..... 이건 이렇게 해야지,.... 너 그 것도 못하냐?..."


형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마 형이 이렇게 나를 가르치려 했다면 지금의 나는 단지 일년에 서너번 스키타는 관광스키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형의 따뜻한 인간애와 스키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게 하여 이제 그것이 내 몸안에서도 살아 숨쉬게 만드는 소중한 스킹의 경험. 

스킹의 모든 순간들이 마치 슬로우모션 처럼 또렷히 가슴속에 화인처럼 박히던 용평 스키장에서의 행복한 추억.

이것이 형과의 기억에 남는 두번째 만남이었다.





3. 세번째 만남


"형 저 캐나다로 이민갈 계획이에요."


"어 그래? 갑자기 왜?"


"형, 혹시 `휘슬러스키장`이라고 들어보셨어요?"


"그럼.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스키장이지."


"아-형도 알고 계시는군요. 얼마전에 양성철이란 사람이 신문기사에 나왔더라구요. 그 사람 레벨3까지 땄는데, 그 레벨3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인터내셔널 강사자격이라고 하더라구요."


"으음 그래?"


"그래서 저도 캐나다 휘슬러로 갈 생각이에요. 그 곳에서 인터내셔널 강사자격을 따면 세계 어디에서든 스키강사로 일할 수 있다니까 정말 괜찮은 것 같아요."


"그리고 휘슬러기사 보니까 정말 멋있더라구요. 산정상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데 하루 종일 걸린데요. 그래서 사람들이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스키탄대요. 눈도 완전히 파우더라 우리나라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그런 눈이래요."


"스키장이 얼마나 넓은지 사람을 보는게 반가울 정도라나요. 야~그런데서 스키 한번 타면 정말 원이 없겠어요."


"지금부터 준비하면 아마 2~3년 후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이것 저것 알아보는 중이에요." 


"으~음 그래...좋겠구나."


혼자 신나서 주절대는 내 이야기의 끝에 마지막으로 형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휘슬러를 이야기하다가 혼자 신나서 얘기하다보니 형의 표정이 많이 굳어져 있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이거 괜한 얘기를 꺼냈구나`하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머리위에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 쓴듯 차갑게 소름이 돋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형이 힘겹게 한마디를 꺼냈다.


"형도 정말 휘슬러에 가보고 싶었는데... 우찬아, 네가 정말 부럽다."


마지막 말마디를 꺼내는 형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하고는 어색하게 이미 많이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까페안은 사람이 별로 없어 더욱 적막하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수유역앞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저마다 바쁘게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봄이지만 아직도 해가 질 무렵부터는 날씨가 많이 쌀쌀하다. 등반이 끝난 일요일 저녁이면 가끔 이 곳 수유역앞에 모여 맥주 한잔씩 마시던 지난 날들의 기억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다. 

형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별다른 말이 없다. 그 오랜 침묵이 답답해 헛기침을 몇 차례하고는 말을 꺼냈다.


"형은 어때요?"


"나? 그저 그렇지 뭐."


"수술은요?"


"뭐 수술을 한다고 특별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야. 아직까지는 수술로 치료할 가능성이 얼마안돼서...일단은 진행과정을 좀 더 지켜보는 중이야."


수척해져서 움푹 들어간 형의 눈빛이 안경너머로 보인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엇인가 형에게 힘이 되는 얘기를 하고 싶은데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좀 전에 혼자 신나서 떠들던 나의 모습이 형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게 저려온다.


형은 죽어가고 있었다. 혈액암의 일종인데 이미 말기에 접어들어선 상태라 수술로도 치유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니 현재까지는 수술로도 치유가능성이 거의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너무 뒤늦게 발견된 탓이다. 지난 봄부터 목이 조금씩 부어오르기 시작했는데 별 통증이 없어서 형은 단지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단다. 그러다가 초가을 무렵 목이 아주 많이 부어올라서 병원에 갔는데 결과가 나오는데도 꽤 시간이 걸려서 계절이 이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뒤에야 병명을 알게 되었다. 


산악회의 다른 선배는 `두현이가 결혼만 했어도 이렇게 발견이 늦지는 않았을텐데` 하며 너무나 아쉬워하였다. 아내가 있었으면 끌고서라도 병원에 가봤을거고 그럼 초기에 발견이 되었을 거라는 말씀이셨다. 그런 상황이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가을 이후로 형은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고 있었다. 그 건강하고 해맑던 미소도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다. 


"형은 아마 이번 겨울에도 스키는 못탈 것 같다. 형이 타던 로시뇰 9S스키 줄테니까 네가 타라. 너 그 스키 많이 타보고 싶어 했지?"


"형, 괜찮아요. 형 나으면 타셔야죠."


"아니야. 지난 한 해 안탔더니 스키가 녹이 슬기 시작했어. 이번 시즌에도 안타면 아무래도 스키가 더 못쓰게 될거 같아. 무엇이던 계속 사용하고 손질을 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법이야. 스키도 마찬가지고. 네가 쓰면서 잘 관리해라. 형이 얼마나 아끼는 스킨줄은 너도 알지?"


"아이 형 그래도..."


"아니야 너가 타라. 형이 그냥 주고 싶어서 그래."


"...."


"그 스키가지고 열심히 연습해서 꼭 휘슬러가라. 레벨3이던 인터내셔널 스키강사이던 뭐 든지 해내야 한다. 네 몫에 형 몫만큼 더 해서...알았지?"


"네..."


"그래....그래..."


이 것이 형과의 기억에 남는 세번째 만남이다.


이 만남이 있은 후 얼마후에 형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였고,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1998년 7월 5일 영원한 안식의 세상으로 떠났다. 형의 시신은 그 후 화장되어 고운 가루가 되어 북한산 인수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뿌려졌다. 그곳은 형이 생전에 가장 즐거워 하던 산악회의 야영장이었기에 아마도 형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장소일 것이다. 




4. 그리고...

 


나는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날의 형의 그 간절했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실수로 꺼냈던 휘슬러 이야기는 형이 너무도 간절히 원했던 형의 꿈이었다. 나는 그 꿈의 휘슬러에 와 있고 그리고 이 곳에서 형의 몫만큼 스키를 타고 있다. 지금도 형이 아끼던 로시뇰 9S는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최신의 스키들과 함께 집안의 한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은 탈 일이 없는 컨벤셔널 스키이지만 내가 평생 간직할 형의 소중한 유품이니까.


스키가 힘들다고 느낄 때나 늘지않는다고 체념이 들 때면 형의 그 스키를 만져본다. 한 사람의 간절한 비원(悲願)을 품고 있는 그 스키를 만지다 보면 내가 얼마나 복에 겨운 푸념들을 늘어 놓는지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잊을 수 없는 꿈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흰 눈 덮힌 산자락에 안겨 스키를 탄다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전율처럼 깨닫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