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고통을 대신하고 싶어도 해줄 수 없는 것이 내게는 또한 마음의 고통이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절실하게, 가깝게, 서서히 지켜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수많은 시간의 회한들과 슬픔과 기쁨의 추억들이 불쑥거리며 튀어나와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내 고집과 번뇌들이 작은 점처럼 사그라져 버리고 나는 벌거벗은채 삶의 진면목과 마주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이토록 절실하게, 가깝게, 서서히 지켜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수많은 시간의 회한들과 슬픔과 기쁨의 추억들이 불쑥거리며 튀어나와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내 고집과 번뇌들이 작은 점처럼 사그라져 버리고 나는 벌거벗은채 삶의 진면목과 마주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나에게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란 단어를 가슴 깊이 툭 던져 놓았다. 막연하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내가 될 것이라는 실감을 가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내 주변에서 사라지고 나니 나의 존재 또한 바람에 흝어지는 먼지처럼 그렇게 사라질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본다면 당연히 죽는 순간의 나를 상상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때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고민하여야 한다.
[조화로운 삶]이란 글로 현대 미국사회에 찬물같은 깨달음을 던진 스캇 니어링(Scott Nearing)의 '간소한 죽음'에 대한 글은 죽음을 대하는 한 사상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은 간결하고 소박해야 한다. 될 수 있으면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겨야 한다.
마지막 죽을 병이 오면 나는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다가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그러므로 죽음이 다가오면 나는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하게 가고 싶다. 따라서,주사, 심장충격, 강제 급식, 산소 주입, 또는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리를 함께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 다니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장례 절차와 부수적인 일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 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의 조언을 받거나 불러들여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내 몸을 처리하는 데 관여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내가 요금을 내고 회원이 된 메인 주 오번의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죽음과 재의 처분 사이에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 헬렌 니어링, 만약 헬렌이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스피릿 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러한 요청들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Memento mori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죽음'은 현대는 물론 고대에서부터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며, 의미있는 삶을 살기위해 반드시 숙고되어야할 부분이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 읽은 것으로 대강 치부하며 넘어가서는 안될, 한 사람의 인생을 그답게 만드는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한다. 아니 생명가진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생존본능이란 것이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회피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는 죽음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 마저도 멀리하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젊고 건강한 인간은 거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며 영원히 살 것 처럼 시간을 값어치없이 보내곤 한다.
하지만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해본다면 우리는 삶에 더욱 진실해지고 그 가치에 눈 뜰 수 있다. 우리가 일 년 후에 죽을것이란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다 의미있게 보내려 노력할 것이다. '의미있게'라는 것이 꼭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있게 여기는 일에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서 우선순위를 제조정하는 것을 말하며, 시간의 양과 질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경쟁에서 이기고 더 많이 성공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삶에서 벗어나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친구들과 등산을 마치고 막걸리를 나누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 아름다운 글을 읽거나 혹은 글을 쓰는 것, 땀흘려 운동하고 시원한 샤워를 즐기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보다 큰 의미를 둘 것이다.
나의 삶이 내일 끝날 수도 있고 육개월 후에 끝날 수도 있다. 언제 죽더라도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루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도록, 그리고 죽음을 당당히 그리고 우아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절실한 죽음의 실감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하던, 어떤 사람이 되어 있건 하루하루가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다. 내게 주어진 오늘 이 순간에 너무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 못할 것이 없다. 세상은 그리고 사람은 아름답게만 보일 것이다. 그렇게 또 다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와~ 오늘도 살아서 눈을 떴네~ 멋지게 오늘 하루를 보내야지. 사랑하면서..."